| 글쓴이 : 최상영 작성 : 2005.06.18 조회 : 2,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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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건전한 가치관이 나라의 앞날 밝혀" written by. 이현오 6·25 참전노병 이갑성씨, 12년 병상 인터뷰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55년이 되는 해지만 아직도 전장에서 남은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있다. 어찌 그 상흔이 국토의 일 부분이나 이산가족의 한스러움, 가족을 잃은 자 들만의 아픔이겠는가! 지금도 전국의 보훈병원에는 당시 입은 부상으로 신음하며 통원치료는 물론 수 십여 년을 장기 입원 치료하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참전용사들이 있다. ▲ 이갑성(74세. 서울)씨 지난 14일 기자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을 찾았다. 본관으로 들어서는 양쪽 진입로는 빈틈없이 주차된 차량과 내원 환자, 가족 및 위문 오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으며 중앙현관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신관 병실로 들어서며 병원 특유의 소독 냄새를 떠올렸지만 냄새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잘 정돈된 병실에 도착, 18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다는 6·25 참전용사이자 오랫동안 병상에서 생활을 해오고 있는 학도병 출신 이갑성(74세. 서울)씨와 마주 대면했다. "어서 와요.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반갑게 맞이하는 이갑성 참전용사는 흔히 보아오는 동네의 인자한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래 입원해서인지 얼굴은 붓기가 있고 온통 하얀빛으로 파리하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전남 목포가 고향이라는 이갑성씨는 전쟁이 일어나던 해 당시 4년제이던 공업학교 2학년학생으로 열 여덟살 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발발했지만 남쪽지방이고 해서 크게 피난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들이닥친 인민군들에 의해 큰 형님이 끌려가 무참히 살해되고 당시 경찰이던 사촌매부와 누나가 마찬가지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전황은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바로 입대를 결심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죽음은 나이 어린 그에게 커다란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게 했고 급기야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대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학도병 1기로 입대 한 것이다. "처음 5사단으로 배치를 받고 부대에 신고를 하니 선임하사님께서 내 나이가 가장 어리다며 운전병이 부족한데 너는 운전병으로 임무를 수행 토록해라" 해서 병력 수송을 전담하는 운전병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 이갑성 참전용사가 환자복을 떠들어 보이며 주사자국을 보여주고있다. 부상은 어떻게 당하게 되었는지요? 53년도 휴전을 얼마 놔두지 않은 때였어요. 부대 선임하사와 함께 안양에서 병력을 태우고 이동 하다가 커브 길에서 차량전복이 됐습니다. 당시 안양에는 유명한 12구비라는 아주 급한 커브길이 있었는데 나와 교대를 한 선임하사가 그만 급커브에서 제대로 핸들을 꺾지 못해 차량이 비탈길 아래로 굴른거죠. 다행히 병력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저만 튕겨져 나와 차량 밑에 깔리면서 허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바로 부산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전시에 제대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당시 부산 군 병원에는 전투 중 다친 병사들이 하루에도 50명 이상이 입원하고 해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나는 약 1년여 동안 이 병원에서 치료하다 어느 정도 호전됐다고 해서 다시 원대복귀를 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병원에 입원치료를 하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후유증인가요? 1955년도에 상이 전역이 아닌 만기전역을 했습니다. 제대 후에도 몸은 정상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어떡합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렇잖아도 전쟁이후에 살 길이 막막한데,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서울로 와서 건축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업학교에서 건축을 배웠으니까 말이죠. 현재의 정부 종합청사도 저의 땀이 스며있는 곳입니다. 그 때 공로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몸은 항상 좋지 않아 계속 병원을 찾아서 치료를 했습니다. 그 때 입은 허리 부상 때문에 금년으로 지금 12년째 입원해있습니다. 척추수술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점차적으로 뼈가 부식 된데다 지금은 통증이 너무 심하고 해서 아편은 아니지만 가장 낮은 단계의 통증치료제로 주사를 맞는데 지금은 하루 보통 12개에서 14개의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엉덩이는 지금 벌집입니다.(허벅지를 보여주는데 무수한 주사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전장에서의 전우애는 피를 나눈 형제애 보다 더 진하다고도 하던데요. 맞는 얘기입니다. 전우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투 상황 등 급박할 때는 대부분 주먹밥으로 식사를 했지요. 당시에는 차량사정도 여유가 없으니 탄약이나 장비, 식사 운반등에 노무자들이 많이 참여했죠. 예전 군대는 참 배가 많이 고팠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틀에 한끼 정도 먹을 때도 허다했으니까요. 쓰레기장을 뒤지고 먹다 남은 것 마저 물에 헹구어 먹을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주먹밥 한덩이를 이들 노무자들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다가 나눠 먹는 그런 정경들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전투현장에서는 또 어떠했는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때 또 고생은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전투복은 광목에다 물들여서 입고, 전투화도 예전 농구화 비슷한 광목으로 만들어 밑창만 고무를 깔았었는데 한 사나흘만 신어도 금방 닳아 떨어지기 일쑤고 겨울에는 동상에 걸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 군인들은 참으로 열심히 싸웠습니다. 다른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공산군을 물리치고, 내가 살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12년이란 오랜 기간을 입원해 가정적으로 어려운 점도 많으셨을 텐데요? 어찌 그것을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어요. 내가 6·25 때 심한 부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결혼한 집사람의 고생이 가장 극심했고 또 자식들이었지요. 다행히 아들 딸 하나씩 두어 그런 대로 살지만 지금도 집사람은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들어가고 다시 아침에 죽을 쒀 가지고 옵니다. 그게 12년 동안 이어진 생활이지요.(이갑성씨는 식사를 못하고 매 끼니를 죽으로 연명한다고 했다. 12년을 한결같이 아주머니가 그렇게 해오고 있다.) 얼마 전 국회에서 공청회를 통해 참전용사에 대한 유공자화에 대한 각계 의견을 청취한 적이 있습니다. 찬반양론이 이어지고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시책이 잘못된 게 뭐냐하면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전장에서의 운전병은 전상이 없고 전부 공상으로만 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전장에서 전후방 구별이 어디 있습니까? 후방에서 다쳤다고 해서 전상이 안되고 공상이다 하면 잘못이죠. 전투에 참전한 군인에게 전·공상을 별도로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받은 보상도 얼마 안 됩니다. 기본 연금이 63만원에 간호수당이 급수별로 조금 나오고요. 6.25때 참전용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됐겠어요? 물론 무공수훈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이 다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한 쪽만 편향적이라면 참전에 대한 의미가 크게 희석되리라 봅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참전용사에게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요. 당시 참전군인들 중 봉급을 탄 사람 별로 없었습니다. 전투에 나가 전사함으로서 못타고, 임무수행 하다보니 이래저래 못타고 나도 5년 군생활 중 훈련소에서 딱 한번 받아보고 그 뒤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부대에서 주고싶어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서도 그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원대복귀해서 55년에 만기제대하고 91년도에 국가유공자가 됐어요. 너무 허리가 아프고 계속 치료를 받다보니 어려움이 많아 신청했더니 확인 후 바로 됐습니다. 상이 2급입니다. 지금 12년째 휠체어를 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 일부에는 북한 김정일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체험세대로서 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꼭 하고싶은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보니 6월이나 어느 시기가 되면 학생들이 자주 위문을 와요. 그러나 위문 오는 학생의 대부분은 초·중·고등학생이 전부입니다. 여태까지 대학생을 본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북한이 6·25전쟁을 남한이 침략한 북침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또 우리 사회의 일부계층과 대학생들이 동조한 적도 있었지요. 최근 북한과 손을 잡으며 쌀을 주고 비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형평성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국민 중에도 못 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한 달을 단돈 30만원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냐 이 말입니다. 젊은이들이 그걸 알아야 해요. 초·중학생들이 가끔씩 와서 전쟁 얘기를 들어보고 놀라워합니다. 제가 그런 얘기들도 많이 해줍니다. 깜짝 깜짝 놀라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대학생은 보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젊은이는 나라의 기둥 아니겠습니까? 젊은 청·장년이 건강하고 건전한 국가관과 시국관을 지녀야 나라의 앞날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세대가 피 흘려 싸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10년 20년을 이 병상에 누워, 휠체어에 의지한 채 생을 보내야 한단 말이에요? 그걸 우리 젊은이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이 확고한 국가관과 건전한 이념을 갖게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마 이것이 참전노병들 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Konas) 2005-06-18 오전 8:59:24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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